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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정육업계 주무른 대부였는데… [ Korean-Community]
mason (17-06-06 02:06:35, 100.2.20.40)
\'워너밋\' 김원호 사장, 지병으로 타계
브롱스 마켓 지켜온 정육업계 산증인

정육업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거칠고 무섭기로 유명하다. 이런 미국의 거친 정육업계에서 유일하게 미국인 정육업자들에게 큰소리를 내며 당당히 사업을 일군 ‘워너 밋’의 김원호 사장(67세.사진)이 지병인 간암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한인업계의 대표적인 1세 사업가이자 미정육업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육류도매업을 하던 한인이었다.
‘워너 밋’ 하면 한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한인들이 먹는 소고기 중 대부분이 워너사에서 가공된다. 미최대 한인마켓인 H마트에서 판매되는 소고기는 물론 웬만한 한인식당에서 먹는 소고기는 대부분 워너 밋에서 공급된다.
필자 또한 개인적으로 김원호 사장과 오랜동안 잘 아는 사이다. 그는 항상 넉넉한 마음을 가진 고향의 대선배였다.
김원호 사장의 일생은 마치 한편의 영화 드라마와 같다. 자타가 공인하는 사업가였지만 그의 험난하고 뼈아픈 이민여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원호 사장은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두리에서 4남매 중 세째로 태어났다. 강릉 중, 고교를 나와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다. 군을 제대하고 무역회사에서 일하다가 31세에 강원도 태백 출신인 김기씨와 82년 결혼,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회사를 사직하고 미국유학의 길을 올랐다. 84년 텍사스 대학원에 입학했지만 공부는 쉽지 않았다. 학업을 포기하고 LA로 가서 스웨터를 팔았고, 식품회사에 취직 막일도 했다. 돈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데로 일했다. 그러나 돈은 모이지 않았고, 오히려 수중의 돈은 다 떨어졌고 신분도 불법체류자가 되어버렸다. 당시 전 재산이라곤 1400여불…그는 이중 600달러를 주고 중고차를 구입한 후 부인과 함께 한살된 아들을 데리고 낡은 중고차로 대륙횡단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때 한국에 계신 어머니 부음소식을 들었지만 신분문제로 한국을 갈수도 없었다. 그는 통곡했지만 마음을 고쳐먹었고, 중고차를 몰고 10일간 운전해서 뉴욕에 도착했다. 뉴욕의 싸구려 반지하에서 월세로 살면서 세탁소에서, 야채가게에서 일했다.
돈을 조금 모은 상황에서 그는 다 망한 육류도매상점을 인수할 기회가 찾아왔고, 매일 4시간만 잠을 자며 열심히 일했다. 피땀흘려 가게를 살려놨는데…전 주인이 그의 불체자 약점을 알고 찾아와 가게를 다시 빼앗아 갔다. 정식 서류매매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빈손으로 나와야 했다.
그러나 그의 신용과 부지런함은 정육업계에 소문이 났고, 헌츠포인트에 중국인이 운영하던 도매육류점을 인수, 자신의 브랜드인 ‘워너 밋’을 차린 것이다. 친구의 도움으로 영주권도 얻었다. 초기 김 사장은 이태리계의 협박을 수십번이나 받았고, 가격도 손가락을 찔리는 협박을 당하며, 그들이 요구하는 가격을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칼에 찔린, 아픈 손가락을 움켜쥐고 그는 아내와 어린 아들의 모습이 떠올리며, 사업에 더욱 전념했고, 탁월한 영업능력과 육류개발로 사업은 번창했다.
또 처음 사업을 시작해 신용이 없었기 때문에 높은 가격으로 물건을 받아 와야 했다. 밤에도 휴일에도 주문받은 즉시 배달해주고,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저녁 9시까지 작업장에서 직접 품질을 관리하는 성실성으로 이 약점을 메워갔다.
한인사회에 기부도 많이 하고, 1998년에는 뉴저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창단했다. 45명의 단원 가운데 한국인은 12명이다 정기적으로 카네기홀에서 그리고 고향인 강원도를 방문해서 평창올림픽 기원 연주회도 가졌다.
직원은 22명으로 불어났다. 이제는 뉴욕.워싱턴.시카고.조지아.보스턴.뉴저지.펜실베이니아 등지의 한국인 슈퍼마켓과 음식점의 주요 육류공급업체로 성장했다. 한국인 사업가 등장을 경계하던 외국인 경쟁자와 금융기관의 박대도 이제는 거의 없어졌다. 1991년에는 딸 재현이도 태어났다.
이렇게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워너 밋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1998년 자금회전이 안되고, 여러 송사에 휘말리면서 워너 밋은 파산신청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자금난을 겪으면서 회사의 문을 \'닫느냐 마느냐\'의 부도 위기까지 처했지만 대부분의 바이어들은 김 사장을 믿고 제품을 구입해 얼마 안돼 회생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는 평소 한인사회의 다음 세대를 위해 정치력 신장을 강조했다. 여러 민주당 정치인 후보들을 도왔고, 힐러리 후보와도 막역한 사이다. 그녀가 민주당 상원의원이었을 때 자택에서 후원행사도 개최했고, 한인후원회장도 맡았다.
“한인 1세대는 언어장벽 때문에 미국 문화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지만 2세들은 미국 문화에 적응할 준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 영향력 있는 정치인과 접촉할 수 있는 끈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한인업계의 대표적 1세 사업가로, 미정육업계를 흔들만큼 견고한 거목으로서 그동안 최전선에서 사업을 일궈왔던 그가...얼마 전부터 지병을 앓기 시작했고, 한인사회에도 잘 나타나지 못했다. 그가 항상 참석하는 강원도 연례행사도 2-3년전부터 참석도 하지 않았다.
“이민 초기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최선을 다하고 남을 도우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생각하며 이겨냈어요.” 불굴의 의지와 집념을 불태으며, 성공적인 이민의 삶을 살아온 김원호 사장은 이제 자신의 어머니 곁으로 갔다.
장례식은 6월 7일(수) 오후 5시 뉴저지 Tenafly Barret Funeral Home에서, 발인식은 8일(목) 오전 10시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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