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1월 초. 어머니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김포공항 출국장에 선 소년은 떨고 있었다. 출국장을 통과할 때 소년의 어머니 손에는 작은 짐 꾸러미 두 개와 300달러가 쥐여 있었다. 미국 이민을 떠나는 모자치곤 단출하다 못해 초라한 행낭이다. 어머니의 머릿속엔 “아들의 교육을 위해 모든 걸 바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형, 누나와 아버지는 한국에 남았다. 소년의 아버지는 정치인이었지만 선거에서 번번이 실패했다. 10여년 터울인 형과 누나는 미국 이민에서 제외됐다. 두 사람은 그해 1월 10일 LA 국제공항을 경유해 미국 중부 캔자스주 작은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어머니가 한국 이민자의 고향으로 불리는 LA나 뉴욕과 같은 동부 지역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은 그나마 기댈 친척이 캔자스주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1982년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일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틈틈이 지역 신문을 배달했고, 방학 때에는 식료품점이나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중.고교 시절에는 주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대학 때는 연구실에서 연구와 잡일을 도맡아 했다. 어머니도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공장 일용직 노동자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미국이 주목하는 바이오기업
그로부터 35년. 소년은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바이오기업의 CEO가 됐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메르스와 지카 바이러스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는 이노비오(Inovio)의 조셉 김(한국 이름 김종)이다. 미국 내 제약업계는 물론이고 보건 관련 국제기구와 미 보건 당국에서도 이제 조셉 김의 존재를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김 대표는 현재 인류를 위협하는 3대 바이러스인 메르스(MERS), 지카(Zika), 에볼라(Ebola)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노비오는 3대 바이러스 치료제를 동시에 개발하는 세계 유일의 기업이다. 메르스와 지카 치료제를 동시에 개발하고 임상에 나선 것은 이노비오가 유일하다. 이노비오 측은 “에볼라 백신 개발에서도 우리 회사가 앞서 나가고 있다”고 했다.
이노비오는 아직 암이나 바이러스 치료제를 생산.판매하는 단계까지 올라가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DNA 백신을 이용해 암이나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다는 연구 성과를 토대로 미 국립보건원(NIH.7000만달러), 미 국방부(6000만달러), 그리고 그 밖의 신규 투자자로부터 막대한 연구개발 자금을 지원받고 있다. 나스닥 상장사인 이노비오의 주식가치는 8월 초 현재, 7억달러를 웃돈다. 이노비오가 가진 기술적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노비오는 메르스 바이러스 백신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한국은 작년에 첫 환자가 발생한 후 38명이 사망하면서 메르스 공포를 혹독하게 겪었다. 그러나 메르스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 백신은 아직 없다.”
리우올림픽과 관련 확산되고 있는 지카 바이러스 공포도 머지않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7월 말 이노비오는 세계 최초로 지카 바이러스 치료제 개발에 대한 임상실험을 FDA로부터 허가받아 미국 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바이러스와의 전쟁뿐만 아니라 이노비오는 암을 치료하는 백신도 개발한다. 임상 3상이 진행 중인 자궁경부암 치료제의 경우 안전성과 면역반응에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올 연말 회사 가치는 10억달러를 넘어서게 된다.
이노비오는 2000년 12월 벤처 바이오로 출발했지만 현재는 나스닥을 대표하는 바이오기업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DNA 백신을 만드는 데 이노비오는 독보적 기업이다. 신체의 세포 가운데 종양이나 바이러스를 막는 특정 세포를 활성화하는 기술을 갖고 있다. 예컨대 자궁경부암 확진을 받은 환자의 암세포를 찾아 제거할 수 있도록 인공 DNA를 만들어 인체에 주입하면 이 인공 DNA가 면역체계를 활성화시켜 암세포를 제거한다. 이 역할을 하는 게 바로 T세포와 항체다.
이노비오가 개발한 주사기에 인공 DNA를 넣어 근육에 투여하면 되기 때문에 시술 또한 간단하다.
“특정 치료물질을 인체에 주입하는 게 아니라 신 또는 자연이 준 면역체계에 인공 DNA를 보내 면역을 활성화하거나 종양을 제거한다. 몸에 칼을 대지 않고 치료한다. 우리 몸은 이미 바이러스 침투 등에 대응하는 면역체계를 갖고 있고 이를 활성화시키는 게 이노비오 백신의 핵심이다.”
\"내 삶의 방향을 바꿀 스승을 만났다\"
그의 어릴 적 꿈은 의사였다. 그러나 고교 졸업 직전 인생의 진로를 의대에서 공대로 바꿨다. 공대에 진학해 제약 또는 백신 개발 쪽에서 일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의사가 진료실에 앉아 하루 20여명의 환자를 진료하며 무료하게 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10만명, 100만명의 환자를 돕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1988년 스탠퍼드대학에서 싹튼 바이오기업이 세계 최초로 주식시장에 상장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기업은 나중에 스위스의 세계적 제약사인 로슈(Roch)에 인수됐다. 이 바이오업체를 운영한 CEO가 매사추세츠공대(MIT) 출신이었다. 그는 그해 MIT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비즈니스와 동시에 기술개발자로서 성공한 사례를 접하고 나서 나도 그렇게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MIT에 진학했고 경영학과 생물학을 복수전공했다.”
그는 한국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수학을 잘하고 기억력이 좋은 학생이었다. 하지만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학교 생활에서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 미국 이민을 결정한 이유였다. 그는 이민을 와서 자립심이 강한 학생으로 거듭났다. 틈틈이 일하면서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1988년 고등학교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다. 당시 그는 프린스턴대, 예일대 등 미국의 여러 명문대학의 합격증을 받아 놓은 상태였지만 MIT를 선택했다.
“캔자스주 샐리나는 시골이다. 동부에 비하면 학교 내 경쟁도 덜 치열했던 것 같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어머님이 열심히 뒷바라지해준 덕에 내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목표를 정하면 그게 이루어질 때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늘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의사가 진료실에 앉아 하루 20여명의 환자를 진료하며 무료하게 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10만명, 100만명의 환자를 돕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조셉 김 이노비오 CEO-
그는 MIT에서 한국계이면서 금융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친구 브라이언 정을 만났다. 브라이언은 MIT 졸업 직후 미국 월가에서 주식 거래 등을 통해 큰돈을 벌었다. 훗날 브라이언은 조셉이 창업할 때 초기 창업비용 30만달러를 선뜻 투자한 인물이다.
1992년 그는 MIT를 졸업한 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제약업체 머크에 입사했다. 머크에서 A형 간염백신 개발에 성공할 때 그 팀에서 일했다. 그는 낮에 일하고 밤에 석사과정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 그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회사에서 급여와 학비 전액을 지원하는 박사학위 과정 이수자로 선발된 것이다. 당시 머크의 전체 직원 수는 10만명이었는데 회사는 매년 1~2명의 직원을 선발해 박사학위 과정을 지원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꿀 수승을 만났다. 데이비드 와이너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은 것이다. 바이오 분야 권위자였던 와이너 교수는 그의 능력을 칭찬했고 그의 연구를 전폭적으로 후원했다. 와이너 교수는 그가 미 국립보건원(NIH)으로부터 연구자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DNA를 통한 치료제 개발의 기초연구도 이때 이루어졌다. 이노비오의 이사회 멤버인 와이너 교수는 그의 스승이자 든든한 동업자로 남아 있다. 그는 1998년 자신을 지원해준 머크로 돌아가 2년간 재직했고 2000년 말 와이너 교수의 도움을 받아 이노비오를 설립했다. 초기 설립 자금은 대학 시절 친구인 브라이언이 댔다.
\"내가 회사를 창업할 때 두 명의 동의가 필요했다. 어머님은 돈 많이 주는 좋은 회사를 그만두고 왜 어려운 길을 가느냐며 반대하셨다. 하지만 당시 약혼자였던 아내는 ‘당신의 꿈을 향해 가라’고 말해줬다. 나는 결국 내 꿈을 좇아가기로 하고 머크를 나왔다.\"
“이노비오가 성장한 건 미국의 벤처 토양 때문에 가능했다. 미국은 바이오, 신약 등의 개발에 천문학적 돈을 대고 오랜 기간 기다린다. 화이자가 1년에 쓰는 연구개발비가 12조원에 달한다. 한국 대기업들이 선뜻 바이오에 손을 대지 못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향후 5년 내에 이노비오의 주식가치를 10조원(100억달러)대로 끌어올리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2020년, 우리가 만드는 바이러스 백신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백신이 환자에게 치료제로 제공될 것이다.
암 치료를 위한 DNA 백신도 그때쯤이면 시판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쯤 되면 이노비오는 미국을 대표하는 바이오기업이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