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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세지만 이민 2세…브로드웨이 무대의상의 대모/직업인 윌라 김 vs 인간 윌라 김 [ Korean-Community]
mason (16-12-27 04:12:32, 100.2.20.40)
윌리 김 여사는 1910년대 하와이로 이민 왔던 독립운동가 김순권, 김노라씨의 4남2녀 중 장녀로 캘리포니아주에서 1917년 태어나 LA에서 자랐다. 셰나르 아트 스쿨과 인스티튜트 오브 캘리포니아 아트 스쿨에서 공부한 후 파라마운트 스튜디오에서 첫 디자이너 생활을 했다.
1950년대 LA 셰나르 미술학교 재학 시절 지도교수 소개로 뉴욕에 진출, 유명 무대의상 디자이너 라울 펜 뒤보아의 조수로 일했다. 대학을 장학생으로 졸업한 직후 뉴욕 할리우드 파라마운트 영화사 스튜디오에 입사하며 본격적으로 무대의상 디자이너의 길을 걸었다.
1961년 오프 브로드웨이 쇼 ‘사랑의 붉은 눈(Red Eye of Love)’의 의상 디자인을 맡으며 무대의상 디자이너로 처음 이름을 알렸다. 이후 연극, 뮤지컬, 영화, 무용 등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수백 편의 의상 디자인을 선보였다.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12년간 작업하며 오비(OBIE)상, 마하람상, 뉴욕연극비평가상 등을 고루 수상했다.
브로드웨이 진출 이후 연극 ‘세련된 숙녀(Sophisticated Ladies.1981)’와 ‘윌 로저스의 풍자극(Will Rogers Follies.1991)’으로 토니상을, 발레 ‘템페스트(Tempest.1981)’와 ‘죽은 용사를 위한 노래(A Song for Dead Warriors)’로 에미상을 각각 거머쥐었다. 연극평론가 존 사이먼은 그의 의상에 대해 “프로그램에서 윌라 김의 이름을 발견했다면 늘 무언가를 기대할 만하다. 그는 결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극찬했다.
1955년 스승 라울의 사촌 윌리엄 펜 뒤보아와 결혼했지만 1993년 사별했다. 슬하에 자녀는 없다. 그의 남편 윌리엄은 프랑스계 미국인으로 ‘파리 리뷰’의 아트디렉터 출신의 작가이자 어린이책 삽화가였다. 데뷔 이후 줄곧 뉴욕 맨해튼에 거주하며 전세계를 무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민 1세대인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동생은 美육군 ‘전쟁영웅’ 김영옥대령
윌라 김의 아버지 김순권씨는 ‘미국 이민 1세대’다. 인천 출신으로 경신학교(경신중.고교의 전신)를 나온 그는 1905년 세 번의 밀항 시도 끝에 미국 땅을 밟는 데 성공했다.
사탕수수농장 등에서 일하며 하와이에서 시애틀로, 캘리포니아로, 다시 LA로 이주한 그는 낮엔 농장 일과 과일 행상을 하고 밤엔 학교에 등록해 영어를 공부했다. 윌라 김의 어머니 노라 고는 수원에서 태어나 이화여전(현 이화여대)에서 신학을 공부한, 당시로선 보기 드문 신여성이었다.
여섯 형제 중 윌라 김과 가장 각별한 이는 두 살 아래 동생 영옥씨였다. 미국인 사이에서 ‘커널(colone.대령) 김’으로 불리는 김영옥(1919~2005)씨는 누나 못지않게 유명한 인물이다. 그에겐 ‘소수인종 출신으로 미 육군 전투대대를 지휘한 첫 장교’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로마 해방을 앞당긴 주역’ ‘6.25 전쟁 무패 신화를 남긴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 등 무수한 타이틀이 따라붙는다. 생전에 그가 미국.프랑스.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받은 무공훈장만 20여개에 달한다. 2005년 2월엔 한국계 미국인 최초로 프랑스 최고 영예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해 10월 우리나라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 서훈자로도 결정됐으나 훈장을 받지 못한 채 12월 29일 별세했다.
윌라 김은 어린 시절 동생 영옥씨에게 미국의 ‘문화’를 가르친 스승이었다. 그는 이민자 출신으로 미국적 사고방식까지 갖추진 못했던 부모 대신 동생에게 옷 입는 법, 말하는 법, 매너 등을 가르쳤다. 영옥씨에게 누나 윌라는 늘 자신을 지켜보고 응원해준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윌라 김은 지금도 소중한 편지 한 통을 고이 보관하고 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장녀로서 늘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영어도 스스로 열심히 공부했고, 디자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반항적이었다. 어릴적 부터 부모님이 김여사를 다루는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원래 예술가들에게 반항적 면모가 있는 것 처럼


김여사는 작업할 땐 누구보다 완벽주의자였다. 그녀도 평소에 이를 인정했다.
“네, 그래요. 누구라도 자신의 일을 잘 해내려면 완벽주의자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디자인하고 만드는 의상이 과거 누구에게서도 발견하지 못한 독창적인 것이길 바라죠. 구태의연한 공식 대신 늘 새로운 모험을 꿈꿔요. 모름지기 예술이란 그런 거니까요. 전 제 스태프에게 절대로 쉬운 해결책은 주지 않거든요. 그들이 관행처럼 사용했던 방법을 답습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아요.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모험해 볼 것을 강요하죠.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 제가 더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고 싶죠. 그걸 해냈을 때 따라오는 결과가 너무 짜릿하거든요.”
세상을 뜨기 전 남편(윌리엄 펜 뒤보아)과는 이미 20여년전 사별했다. 김여사가 기억하는 남편 윌리엄은 아주 멋진 사람이었다. 뼛속까지 예술가의 기운이 흘렀고, 그의 아버지도 미국에서 꽤 유명한 화가였다. 그녀의 무대의상 디자이너의 길을 열어준 라울은 남편의 사촌이었다. 남편은 무대를 이해할 줄 알았고 김여사의 일을 인정해줬다. 또 남편은 유머감각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 자녀가 없었는데, 사별한 후에도 주변에 친구들이 많아 외롭지 않는 여생을 보냈다고 했다.
“제 곁엔 친구들이 꽤 많습니다.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죠. 작가, 시인, 댄서 등 대부분 예술 분야 종사자들이에요. 영국 친구들도 꽤 사귀었는데 슬프게도 몇몇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됐죠.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전 혼자 있는 걸 즐기는 편입니다. 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가끔은 혼자 조용히 지내고 싶거든요. 한창 일에 쫓길 땐 혼자만의 시간이 그립기도 해요.”
그녀가 99세까지 장수한 이유는 소식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 음식 중에선 설렁탕을 좋아했다. 평소에 맨해튼 32가 한인식당가 특히 ‘큰집’을 자주 갔었다고 한다.
그녀는 인생의 성공에 대해서 후배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어떤 분야든 죽어라 하고 밀고 가는 집념과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한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디자인에도 지식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많이 공부하고 연구해야 해요. 또하나 예술가든, 사업이나 다른 어떤 분야이든 독창성과 창조성이 없으면 끝입니다. 늘 자신만의 시각으로 독창적 디자인을 창출해 내려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초라해도 자신의 아이디어가 중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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